[363호 종교개혁 특집] 종교개혁의 정신: ‘아드폰테스’ (Ad Fontes): “커피 맛은 아메리카노의 맛으로 결정된다”

총신대보
2022-11-30


‘아드폰테스’(Ad Fontes)는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basic)’는 의미의 라틴어다. ‘아드폰테스’는 라틴어 성경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에 등장한다. 라틴어 ‘아드(ad)’는 영어로 전치사 ‘to’이며, 폰테스(fontes)는 원천(fountains) 또는 근원(sources), 기본(basics)를 뜻한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기독교 문화 사역으로 커피일을 해왔다. 실제로 커피를 로스팅하고 커피 메뉴를 만들고 커피를 여러 매장에서 팔고 있다. 커피에서 가장 기본은 머신에서 샷을 어떻게 내리냐는 것이 중요하다. 커피의 맛도 커피 음료중 일반적인 메뉴인 카페라떼, 카페모카, 카라멜 마키야또의 맛도 샷이 기본이다. 카페 매장에서 커피 기본 메뉴인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스 샷을 맛보면 그 카페의 커피 맛과 수준을 알게 된다. 기본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종교개혁 505주년을 보내면서 16세기 대표적인 종교개혁자 독일의 마틴 루터와 프랑스의 존 칼빈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를 다시 생각해 본다. 종교개혁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무엇일까? 그것은 ‘기본으로 돌아가라’ 혹은 ‘근원으로 돌려놓자’는 주장인데, 이는 16세기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의 구호였다. 이는 오늘날 21세기에도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라고 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와 교회에 가장 필요한 일이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아드폰테스’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아드폰테스’ 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네델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이다. 에라스무스는 네델란드 태생의 인문주의자로 교회의 부패를 개혁하고 사회를 정화시키는데 정열을 바친 신앙인이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의 그늘에 가려 그의 명성이 퇴색되기는 했어도 당시 시대적 상황에 비쳐볼 때 인문주의자로서의 그의 태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이 인문주의 시대는 어느 역사가의 지적대로 근세적 요소와 중세적 요소가 혼합된 시대였다. 그는 매우 신중한 인물이었으며 과격한 행위나 결단을 원치 않았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는 ‘그러나’ ‘만약-..치 않으면’과 같은 용어였다. 개인적으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에게 부러운 것은 관용 그리고 절제된 생활과 내면적 경건이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크리스천의 삶에서 관용과 절제가 중요함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 우리 시대에 가장 아픔은 코로나 19 팬데믹의 공포보다, 박근혜 문제인 윤석열 정부에 이르면서 정치적인 자신들의 입장이 종교적인 신념보다 더 강해서 분열과 경직된 한국 정치 문화에 이해와 절제 그리고 상대편에 대한 관용이 사라진 것이다. 이 심각한 질병을 생각하면 자유로운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세상이 부러울 뿐이다.

에라스무스는 1467년 10월27일 네델란드의 로테르담시에서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475년부터 1484년까지 에라스무스는 ‘공동생활의 형제단’(Brethren of the Common Life)이 운영하는 디벤터(Deventer)에 있는 성 리브윈 수도원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의 부친이 사망한 후 그는 헤르토헌보쉬(Hertogenbosch)의 학교로 갔다. 공동생활의 형제단은 네델란드 출신의 제라드 후루테(Gerard Groote)의 제자들이 조직한 원시 기독교로의 복귀를 주장한 단체인데 이 운동의 창시자 후루테는 ‘경건’을 신앙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강조하며 크리스천들의 공동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삶을 주장한다. 한편 이들의 운동을 14세기 후반의‘ 근대적 경건 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운동이 갖는 용어의 의미는 ‘ 매일 헌신’으로 영적 부흥 운동을 뜻한다. 즉 이 운동의 멤버들은 공동 생활을 통해 헌신을 배우면서 순수한 신앙을 위해 훈련을 했다. 이 운동이 오늘날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이 운동의 역사적 평가와 의의보다는 이들의 일상 생활의 모습이다. 그들의 일생 생활을 소개하면 형제 단원들은 3시에서 4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전까지 기도와 독서의 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며 또한 환자를 방문하고 전도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고전을 복사하여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 저녁 8시 이후면 모든 일은 중단되고 8시 30분에 취침 시간에 들어간다. 이들에게 중요했던 일은 주일날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 구절을 형제단 사람들과 논의하는 일이었다. 총신에서 기독교 학문을 말하면서 종종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수업이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학문을 강조하지만, 체질화되지 않는 실제적인 삶과 무관한 기독교 학문의 공허함이 있어보인다. 또한 총신 공동체에 경건과 학문의 자유함이 없이 규정화된 구속과 억압 종종 강제성이 기독교 학문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이 염려된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로서 에라스무가 훈련 받은 공동생활의 형제단은 신앙 훈련과 학문에서 자유함과 즐거움이 묻어 나온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총신 캠퍼스에서 지내는 동안 학문과 경건에 진정한 자유와 즐거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드폰테스’ 운동은 기독교 학문의 자유함을 추구한 인문주의운동이다. 기독교 인문주의는 지적 갈급함과 학문의 깊이 그리고 학문의 자유함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생활의 형제단의 훈련과 성격을 통해서 실천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열정을 볼 수 있다. 사랑과 구제를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 직접 실천하며,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모습에 큰 감화를 받는다. 그리고 이들은 교회와 수도원을 개혁하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개혁을 위해 이들은 청소년 교육에 정열을 바쳤다. 이들이 교육에 관심을 가진 것은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을 통해서는 더 이상 개혁이 어렵다고 보아서 청소년들을 훈련시켜 바른 교회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공동생활의 형제단 출신의 가장 유명한 사람은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인데, 아켐피스도 12세때 이 운동에 가담했다. 라틴어로 쓰여진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 라는 저서는 이 운동을 가장 잘 묘사한 책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크리스천의 삶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 아켐피스는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알고, 세상 지식을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알아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무익하다고 하면서 인간의 무지한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공동생활의 형제단에서 훈련받은 에라스무스는 1487년 어거스틴파 스테인(Steyn) 수도원에 입문하여 인문주의 연구에 심취하였고 1492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수도원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여 1495년 몽테뉴(Montaigne) 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 파리 유학 중 그의 생활은 매우 빈곤했으며 불결한 음식과 비위생적인 주거 생활로 인해 질병을 얻어 고생을 했다. 한편 1499년 에라스무스는 영국을 방문하는데 이곳에서 그는 영국의 저명한 학자들인 콜렛(John Colet, 1467–1519)과 모어(Thomas More, 1478~1535)와 만나 신학적인 논쟁과 토론을 하면서 자유로운 학문의 세계를 경험했다. 1517년 이후 부터 에라스무스는 스콜라 신학자들로 부터는 교회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비판을 받았고, 개신교도들로 부터도 개혁 의지가 약하다는 비판으로 인해 고독속에 지내게 된다. 그래서 영국 여행 이후 에라스무스는 거의 20년 동안 오직 서재에 묻혀 저술 활동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고독을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 개혁자로서 개혁에 교육이 중요함을 말하고, 자신도 그러한 훈련을 받았다. 이것이 교육을 강조하는 에라스무스 개혁의 정신 ‘아드폰테스’ 중의 하나이다. 종교개혁자중에 교육 개혁은 루터와 칼빈의 개혁사상에서도 잘 보여진다. 루터는 1520년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1524년 ‘기독교 학교 설립과 유지에 대하여’, 1530년 자식을 학교에 입학시켜야 하는 점에 대하여‘ 라는 저서를 통해 교육 개혁과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루터보다 교육에 더 관심을 보인 개혁자는 칼빈이다. 칼빈은 개혁의 양날개로 교회와 학교의 개혁을 말하고 있다. 1559년 설립한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보여준 칼빈의 개혁은 기독교 인문학과 교양학의 강조 그리고 전문 기독교 교육 커리큘럼 강조에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교육 개혁과 관련하여 총신이 기독교 대학으로 한국 사회와 교회에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위해 기독교 인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커리큘럼의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기독교 학문은 성경적 세계관에서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교양과 세상 학문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하나님을 아는 기독교 학문의 통찰력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면에서 총신은 경건과 영성 강조만큼이나 더 진지한 학문의 열정이 캠퍼스 강의실에서 있어야 한다.

에라스무스의 저술 가운데 가장 대표적 저술은『우신예찬』 (Encomium Moriae, 1511)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교회 갱신과 수도 성직자를 비판하고 나선다. 재미있는 사실은 라틴어로 모어(Morus)의 성이‘ 그리스어로‘ 어리석은’(우신)을 뜻한다. 즉 이 저서는 영국의 인문주의자인 모어에게 헌사하며 그를 예찬한 작품이라 볼 수 있는데, 1509년에 저술된 이 『우신예찬』은 1511년에 출판되어 유럽 전역에 알려지면서 에라스무스를 일약 유명하게 했다. 이 저서는 시대의 변화를 요구한다. 즉 중세는 무지와 몽매의 시대였으므로 에라스무스는 휴머니스트들의 사명이 시대를 계몽하고 교회와 사회를 갱신하는데 있다고 보면서 이 『우신예찬』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이 저서에서 에라스무스는 중세 후반의 크리스천들의 잘못된 신앙과 타락한 교회 성직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중세 크리스천들의 광신적인 신앙을 하나의 미신이라고 보면서 이 변질된 신앙은 성모, 성자에게 기적을 바라는 기도로 일관되어 있다고 우려했다. 에라스무스는 크리스천들이 단순히 세례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는 형식적인 신앙을 비판하면서 진정으로 내면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경건을 자신의 저서에서 요구하고 있다. 『우신예찬』이 책은 ‘우매함’이라는 부인을 내세워 풍자적 방식으로 당대 현실을 비판한다. 이 바보들의 목록은 수사학자, 법률가, 철학자, 귀족들, 금전착취자, 신부, 군주, 추기경 등 당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우매함이라는 부인은 가톨릭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명함이 이 분들의 정신을 단 한번이라도 점령한다면 이 성스러운 신부님들께서는 얼마나 많은 보물을 잃게 될까요. 그 엄청난 부, 하나님의 명예, 수많은 고관대작직의 분배, 셀 수도 없는 사면, 그토록 다양한 세금, 향락, 쾌락의 자리에 불면의 여러 날 밤, 단식, 기도와 눈물, 그리고 예배와 수천 가지의 다른 힘겨움이 대신 들어서게 되겠지요.” 당대의 가톨릭의 부패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적 비판인 셈이다.

16세기 에라스무스가 말하는 풍자와 개혁은 오늘날 이 시대의 언어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판한 에라스무와 루터의 외침이 이제 우리 자신의 교회를 향하고 있다. 오늘날 개신교 목사들은 바보이기를 거부하고 로마 교회의 교권주의자들처럼 권위적인 신분이 된 지 오래가 되었다. 이러한 비판에 교단의 총회와 노회 정치가 그러하고 학교의 교권 역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총신은 이 세상에서 더 유명해지려고 하지 말고, 1901년 마포삼열 목사가 평양신학교 설립을 통해서 보여진 교회에 필요한 지도자 양성의 설립 이념을 기억하여 총신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 필요한 학교가 되어야 한다. 돈이 있고 사람수가 많으면 그리고 몸이 커지면 조직과 사람은 교만하기 쉽다. 총신의 자랑은 한국 사회에서 더 유명하려고 말고, 다른 일반 대학 구성원과는 다른 겸손한 사람들이 일하는 교직원, 그리고 복음에 진지하고 순전한 학생들이 총신의 자랑 거리가 되어야 한다. 총신 학문의 ‘아드폰테스’는 우리가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던지 간에 전공과 관계없이, 우리의 학문은 하나님 나라와 복음과 어떠한 관련이 있어야 한다. 총신은 한가지 ‘아드폰테스’의 기본과 본질, 즉 ‘하나님 때문에’ 목사가 되고 ‘하나님 때문에’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에라스무스의 개혁에서 성경 번역이 중요하다. 에라스무스는 성직자들의 부도덕과 성경 해석의 오류를 그의 저서에서 비판했다. 당시 성직자들의 잘못은 성경의 인위적인 해석에 있다고 그는 보았다. 이것이 에라스무스를 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토록 했던 것 같다. 1516년 신약성경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한 사실은 최초의 라틴어 번역본이라는 점에서 대단한 성과였다고 본다. 그의 저술 저변에 흐르는 개혁 의지는 성경의 권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성경이 직업과 인종을 초월해 즉 부녀자, 농부, 직공들이나, 스코틀랜드인, 터키인, 사라센인 모두에게 읽혀져야 한다고 보았으며 성경의 바른 이해가 영적 순수성과 교회의 도덕적 개혁에 기초가 된다고 주장했다. 16세기 종교 개혁시대에도 성직자들의 교리적 탈선과 성경의 잘못된 해석은 당시 개혁가들을 더욱 결집하게한 배경이 되었다.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토대를 에라스무스가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교회사에서 성경의 바른 이해는 신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성경번역이 초석이 되어 마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번역되게 된 것이다. 이런측면에서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낳은 개혁의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고 한다. 루터는 모든 일반 교인들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주장하면서 로마 교회의 교권을 공격했다. 개혁의 3대 슬로건이 ‘은혜만으로’(sola gratia), ‘믿음만으로’(sola fide), ‘그리스도만으로’(solus Christus) 인데,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하여만 알 수 있다는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가 강조되게 되었다. 이것이 역사적인 종교개혁이 정신이며 개혁의 기초가 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처럼 성경이 교회에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성경이 신앙과 경건에 중요하다가 아니라, 성경은 우리 신앙과 학문에 가장 필요한 유일한 절대적 권위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함이 개혁의 기본 정신인 ‘아드폰테스’이다.

에라스무스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한 인간성 때문에 비판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공동생활의 형제단을 통해 배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은 현대 크리스천들의 경건적 무감각에 도전을 주리라 믿으며, 그의 대표적 저서『우신예찬』에 나타난 미신적인 신앙과 수도 성직자들의 타락 그리고 스콜라 철학의 형식화에 대한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는 그의 개혁 사상은 그를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게 한다. 또한 그의 저술과 성경 번역에 기여한 그의 업적은 종교개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신학적 한계는 루터와의 논쟁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중세 로마 교회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특히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과 같은 교리적인 문제는 루터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 교리와 마찰을 일으켰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지유의지에 반하여 노예의지를 강조한다. 루터는 인간의 의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고 마귀를 따르는 일에 익숙한 노예의지만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했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는 아담의 타락이후 완전히 타락하여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자유의지라는 말은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모든 결정에 자유로우시고 행할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이라 한다. 즉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죄를 짓는 노예의지만 있다고 한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쓸 때에 이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종교개혁 시대의 교리 논쟁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교리를 한 가지 논점으로 보지 말고,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자유의지의 문제만 해도 구원, 예정 섭리적 관점에서 자유의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1535년 바젤로 돌아온 후 에라스무스는 요결석이라는 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1536년 7월 12일 자신의 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비로우신 예수님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자비가 저에게 임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여”라고 마지막 기도를 하면서 그의 일생을 마감한다.

2022년 11월의 마지막 날에 코로나19 펜데믹의 예상되는 마지막 시점과 종교개혁 505주년을 보내면서 총신인들에게 그리고 한국 교회에 개혁의 정신 ‘아드폰테스’의 정신을 다시 말하면서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16세기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시대정신 ‘아드폰테스’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루터의 개혁은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은 양심과 성경이었다. 1521년 보름스 제국 의회에 출두한 루터는 그가 쓴 모든 책과 주장을 철회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철회하거나 거스를 수 없습니다. 지금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불편하거니와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한국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기준이 있어야 한다. 총신도 다른 대학과 다른 기준 ‘아드폰테스’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학교 교육 목표대로 성경적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 학문 그리고 한국 교회에 필요한 영성과 인성을 겸비한 지도자 양성,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해 보이는 세상과 구별되는 총신 공동체의 순전함과 겸손함이 절실하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근대화의 과정에서 총신은 시대앞에 부끄럽지 않는 흔적을 남겼고, 후배들은 이것을 선배들의 자랑거리로 여기며 지금까지 총신이 존재해왔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근대화와 민주화의 과정에서 총신이 보여준 것은 한국 교회와 사회에 필요한 학교가 되었다. 앞으로도 총신은 기다리는 후배와 다가올 역사 앞에 좋은 자취와 흔적을 남겨서 후배들이 자랑하는 ‘총신’ 이름 조차도 사람을 설레게 하는 총신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아드폰테스’ 개혁이 오늘도 내일 그리고 2023년도에도 지속되기를 총신 졸업한 사람으로 그리고 총신의 선생으로 먼저 자성을 하며 글을 마친다.


권태경(총신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신앙과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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